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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카 와이티티, '조조 래빗', 2020

by the frank 2020. 4. 13.

 

영화 ‘조조 래빗’(감독 타이카 와이티티)/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이 영화는 제 2차 세계대전 막바지, 엄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10살 꼬마 소년 '조조'의 이야기를 그린다. '조조'는 히틀러를 동경하며 나치의 사상에 흠뻑 빠져있는 아이다. 상상 속의 친구가 '히틀러' 이니 말 다했다. 그가 그토록 원하던 독일 소년단에 입단하지만 겁쟁이라 놀림을 받고 래빗이라는 별명을 얻게된다. 수류탄 교육 중 다치게 된 조조는 독일 소년단에서 나와 잡일(선전전단 붙이기 등)을 하게 된다. 집에 자주 머물게 된 조조는 집의 비밀 공간에서 지내던 엘사를 발견하게 된다. 상상 속의 친구히틀러, 엘사, 조조, 그리고 조조의 엄마가 풀어가는 전쟁, 혐오, 갈등을 이야기하는 영화 '조조래빗'

1. 혐오란 무엇인가?
증오는 사전적 의미로 '사무치게 미워함 또는 그런 마음'을 말한다. 혐오는 사전적으로 '미워하고 꺼림' 이라는 뜻을 가진다. 이 둘은 크게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상당히 큰 차이가 있다.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감정은 대상과의 상호작용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어떠한 신체 감정적 접촉 없이 증오가 일어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여기서 말하는 상호작용은 한 다리를 거치는 상호작용도 포함된다. 즉 내 가족 혹은 나의 친구에게 일어난 일이 나에게 전달 되었을 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일이다. 예를 들어보자. 내가 A라는 사람을 증오한다. 이유는 우리 부모님에게 못된 짓을 했기 때문이다. 그사람을 혐오 하지 않고 증오한다. 미칠듯이 싫어서 해코지하고 싶은 감정이 일어난다. 직접적인 증오의 감정의 발생은 굳이 예를 들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반해 혐오는 대상에 대한 상호작용 없이도 가능하다. 단순한 하나의 기준으로 옳고 그름, 좋음 나쁨을 나눈다. 혐오란 대상간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싫어함이 나타나는게 아니다. 기준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어릴 적 짝꿍과 같이 쓰던 책상에 선 긋고 넘어오면 내 것이라고 했던 것을 생각하면 쉽다. 물건에는 죄가 없다. 그것을 구분 짓는 사람이 문제지... 군대에 가면 정신교육을 한다. 우리의 주적을 반복적으로 교육한다. 그것을 통해 나는 그 어떤 상호작용도 없이 북한을 혐오하게 된다. 해코지하고 싶다가 아니고 싫어서 피하고 싶고 북한이라는 단어만 나와도 왠지 싫은 감정이다. 이런면을 볼 때 증오와 혐오는 유사하지만 매우 다르다. 증오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해소가 가능하다. 직접적으로 해코지를 하거나 혹은 상호작용을 통해 사과를 받거나 등등의 방버이 존재한다. 하지만 혐오는 그렇지 않다. 매우 위험한 감정이다. 상호작용 없이 꺼리고 피하는 것이기 때문에 해소할 방법이 없다. 문제는 기준이지 서로가 문제는 아니니까. 그런데 기준을 없애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사람의 사고에서 하나의 벽(선입견)을 허무는 일은 세상을 바꾸는 일보다 어려울지 모른다. 혐오를 해소하는 일은 매우 큰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혐오를 하는 입장이나 당하는 입장 모두 벽을 두고 상상 속에서 서로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혐오에 관한 이야기이다. 조조는 어릴 적부터 사상교육을 통해 유대인을 혐오한다. 여기서 기준은 인종? 출신성분? 이다. 진짜 독일인은 선이고 그 외의 것은 악이다. 그중 가장 큰 악은 유대인이다. 그들을 인간이 아닌 괴물 혹은 혐오스러운 무언가로 설정하고 없어져야할 것이라고 쉽게 생각한다. 한 인간으로 유대인을 생각하는 것이 아닌 호랑이나, 사자 등의 동물의 종의 하나 정도로 생각한다. 그래서 뭔가 인간(독일인)과는 차별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유대인 사전을 만들기 시작한다. 여기서 혐오의 큰 특징이 나온다. 서로 접촉해서 서로를 인정해서 싫어하거나 좋아하거나 하는 것이 아닌 그저 상상 속의 어떤 것, 머리 속에서 생각하는 대로 대상을 생각하고 확정지어 혐오의 감정을 입힌다. 굉장히 무서운 일이다.

현대 사회에서 혐오는 일상이 되었다. 인종, 남녀, 동성애, 빈부차 등등의 것들로 나타난다. 과거에는 발달하지 못한 교통과 통신으로 인해서 자연스럽게 선 혹은 벽이 생겼고 그래서 혐오가 생기기 쉬운 조건이었다. 이런 상황을 이용한 권력자가 민중의 분노를 외부로 돌려 혐오라는 감정을 이용했다. 가난, 재난 등의 것을 외부의 다른 것으로 돌려 혐오의 감정을 만들어 내곤 했다. 현대에는 어떠한가? 교통과 통신이 발달했다. 혐오가 사라지기 좋은 환경이다. 큰 혐오들은 많이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부분적인 혐오가 난무한다. 우라나라의 예로 들면 빈부의 혐오가 있다. 국가 임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을 혐오하는 부잣집 아이들이 같이 말이다. 이것은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과거에는 집단적인 선과 벽을 만들었다고 한다면 현대에는 개인적 혹은 소규모의 선과 벽을 통해 혐오가 생겨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선과 벽 안에서 개인 혹은 집단은 안정감을 느낀다. 누군가를 혐오함을 통해 정상임을 인정 받는 것이다. 그래서 이유없는 증오가 가능한 것이다. 나의 존재가 정상임을 인정받아야하니까. 위에서 예로든 부를 기준으로 하는 혐오에서는 자신이 부자임을 스스로 인정하기 위해 가난한 자가 존재해야한다. 그리고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감정이 있어야 본인들이 부자로 인정받는 것이다. 혐오란 결국 한 개인, 집단이 우월한 위치를 인정받기 위한 파괴적 혹은 공격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는가?

 

2. 혐오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가?

영화가 진행될수록 혐오의 대상이었던 엘사에게 조조는 호감을 보인다. 그리고 기준을 세워줬던 상상속의 히틀러는 점점 사라진다. 혐오라는 감정이 영화를 관통하며 사라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쉬운 과정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같이 있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는 둘은 차차 서로를 알아간다. 한 인간으로서의 엘사를 알아가는 과정, 무엇을 좋아하는지, 누구와 만나는지 등등 그것이 혐오를 사라지게 하는 해결책이다. 직접 부딪혀야 한다.

그리고 교육이 중요하다. 사람은 하나의 기준으로 묶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각각의 개개인이 모두 하나의 세계를 가진 매우 특별한 존재이다. 이런 것들의 교육이 서로를 혐오하지 않고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조조의 엄마는 히틀러를 반대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날 수 있게 비밀업무를 수행한다. 그녀는 히틀러 사상에 심취해 있는 조조에게 혐오를 그만 둘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천천히 이야기 한다. 그녀는 조조에게 신발 끈 묶는 법을 가르쳐주고 직접 신발끈을 묶어 주었다. 그녀가 공개 처형 당한 후 조조는 벗겨진 그녀의 신발을 결국 신겨주지 못했다. 그녀가 매번 신겨주던 신발을 조조는 신겨주지 못했다. 이 영화가 하고자 하는 말이 가장 잘 드러난 장면이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 가르쳐주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습득하기까지 매우 긴 시간이 필요하다. 본인이 필요로 하거나 바뀌어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있다. 그 날 이후 조조는 혼자서 신발끈을 묶을 수 있게 되었다.

 

3. 개인을 존중하는 것

이 영화에서 나오진 않았지만 혐오의 큰 문제는 집단을 나누는 기준을 만든다는 점이다. 우리는 모두 인간으로 태어났고 모두 원치 않았지만 세상에 나왔다. 모든 개인이 자기 기준에서의 희노애락을 가지고 있고 미와 맛의 좋음과 나쁨을 가진다. 그러면 우리는 집단적인 생각을 버리고 아주 개인적인 생각을 가지고 상대를 대해보는 건 어떨까? 내 기준에서 좋음 나쁨을 통해서 사람을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있다. 그 기준을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으면 혐오는 쉽게 생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개인, 하나의 인간을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으로 대해보길 바란다. 그 과정속에서 나오는 좋고 싫음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니..

혐오가 끝나고 서로 음악 없이 춤을 추는 장면에서 개별 인간들은 모두 같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독일인이건 유대인이건 같이 웃으며 춤을 출 수 있는 한 인간이다. 그저 만들어낸 기준으로 혐오하고 혐오의 대상이었던 둘이 활짝 웃으며 춤을 춘다. 혐오를 멈추고 춤을 춰보자. 혹은 서로를 향해 춤추고 웃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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