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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k log

명상 Mindfulness @piknic , 2020

by the frank 2020. 4. 27.

'명상 Mindfulness' 전시회를 추천 받고 한걸음에 달려 갔다. 휴가의 목적이 다양한 경험을 통해 새로운 것을 찾는 것 그리고 정신적 불안을 잠시나마 잊는 것이었다. 이 전시는 나에게 딱 맞는 경험이었다.  관람이 곧 체험이 된다.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듣고 경험한다. 

명상은 영어로 'meditation'이라 한다. 이 전시에서는 'mindfulness' 라는 명칭을 붙였다. 심리학적으로 쓰이는 용어로 '마음 챙김' 이라는 뜻을 가진다. '명상'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비움'이다. 어지러운 마음을 비우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을 '명상'이라는 용어로 칭하곤 했다. 이 전시에서 '마음 챙김'이라는 단어를 차용하면서 주고자하는 의미는 '명상'을 비우는 행위로써가 아닌 자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알아가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해당 전시는 관람이 곧 체험이다. 그래서 전시 내부는 촬영이 불가하다. 전시의 끝 층인 4층 테라스는 촬영이 가능했다. 사진이 없어도 양해바란다. 기억을 더듬어 해당 전시를 경험하면서 인상 깊은 장면들에 대해 얘기해보겠다.

 

전시는 지하 1층부터 한층 한층 위로 올라간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첫 장면이 꽤나 충격적이다. 어두운 장소에 모래? 어떤 가루가 깔려있다. 그리고 그 모래에 향이 꽂힌 상태로 스스로를 태우며 연기를 내뿜는다. 한 외국 남성으로 나레이션이 들린다. 그에 대한 번역이 바닥에 나타난다. 어둠과 향 그리고 낮게 깔린 외국인의 나레이션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내용은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죽음을 기다리는 존재가 아닌 죽어가고 있는 존재라고 한다. 현대 철학을 접해본 사람이라면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 그렇지 않았다면 다소 이상한 이야기.

짧게 말하자면 죽음을 현재로 끌어와(죽어가는 존재로 인식) 현재의 중요함과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하고싶은 것을 해라) 현대철학의 핵심 한 조각을 전시한 방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순례자의 길, 고행, 이 단어는 말만으로을 쉽게 상상되거나 이미지화 되지 않는다. 인생에서 경험해 보지 못했거니와 주변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것을 어찌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것을 영상화 시킨 방에 앉아 한참을 그 영상을 보았다. 1인칭 시점에서 천천히 돌산을 올라간다. 여러가지 색깔의 천들이 스산하게 날리고 하늘은 회색 빛이다. 그 영상을 보면서 불안감이 솟구쳤다. 우리 아니 나는 습관처럼 기승전결을 생각한다. 모든 것에 결과를 기다린다. 영상을 보면서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나중에 정상에 올라가나? 하는 등의  생각에 사로잡혀 짜증이나 긴장상태였다. 영상이 길어지고 우리는 깨닫는다. 고행은 어떤 결과도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도 어쩌면 고행이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혹은 결과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차분히 그 과정을 경험하고 지켜보자. 어쩌면 바로 앞에 있는 돌, 경사 높은 산길, 이곳 저곳에 어지럽게 있는 천을 보는 과정이 우리네 인생일지도 모르니.. 조급해하지 말고 자기에 집중하자.

 

 

전시 막바지 주황색 불빛이 가득한 방에 사람들이 몇 와서 앉으면 '전시 시작하겠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불이 꺼진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감각의 예민함이 극에 달한다. 외부의 소리는 물론이거니와 나 스스로에 대한 감각이 뚜렷하다. 불안감에 뛰는 심장, 내 피부에 걸쳐진 옷의 촉감, 신발 속 습함을 느끼다 보면 이내 안정이 찾아온다. 암전 속에서 눈을 감고 나의 몸에 집중한다. 목 어딘가 핏줄에서 피가 흘러가는 느낌, 머리 속에서 어지러운 생각들이 떠오르는게 아지랑이 처럼 시각화된다. 혼란을 지나 안정의 과정을 거치니 주황불이 서서히 켜진다. 생각이 명료해진다. 다시 혼란이 찾아왔지만 짧은 그 과정 속에 나를 경험할 수 있었다.

 

나는 무엇인가? 명상은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나의 평온함을 찾는 과정이 아니다. 나는 여러 명칭 속에 살아간다. 내 이름부터 나의 직위 혹은 별명 등의 명칭 속의 특징과 의미로 산다. 그래서 나는 여럿이다. 타인이 불러주는 나라는 사람이 모이면 내가 된다. 하지만 한가지가 빠져있다. 내가 부르는 나는 무엇인가? 나는 나를 잘 부르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혹은 무엇을 싫어하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를 아니 나에 집중해야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 명상이 단지 자기를 비우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오히려 여러가지 잡념과 화, 짜증, 분노가 밀려오는 상황을 통해 나는 무엇이 현재 좋고 싫은지를 알아 가는 것, 그렇게 나를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나의 마음을 챙기는 것, 그것이 명상이다. 인생은 한번 살아간다.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우며 외부의 많은 것들과 접촉한다. 그렇지만 나와 나는 접촉할 기회가 많지 않다. 나는 나를 생각하거나 이미지화 할때 이상적인 부분을 덧 씌우고 생각한다. 객관적이지 않고 지극히 주관적이다. 그러다보면 괴리가 생기고 그것은 마음의 병이 된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생각보다 멋이 없고 찌질한 나를 이해할 때, 그제서야 새로운 내가 보이고 행복한 나를 만들 수 있다.

 

이 글은 취기가 있는 상태에서 썼다. 여기서 몇가지 나를 고백하자면 나는 술을 좋아한다. 나는 깊은 지식은 없다. 나는 겉으론 대범하나 속은 소심하다. 나는 솔직하지 못하다. 나는 멋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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